'집나간 노라'를 수업해야 할 조카가 시집감서 학원을 그만 두겠단다. 옛날 직장에서 오라고 야단이란다. 갑자기 그만 두니, 그 애가 맡고 있던 꼬마 애들을 니들도 집으로 그냥 가라 할 수 없어서, 다른 샘을 뽑기 전까진 내가 맡기로 했다. 애들이 초등 4학년이니까, 50년 넘게 차이가 나네. 천년전 사람도 친구 먹는다는데, 그깟 50년이야 이제부터 니들과 나는 친구다.
요즘 애들은 똘기가 장난이 아니다. 어디 영재원을 다녀서 그런가. 원래 똘랑한가, 어디에서 줏어들은 것이 엄청 많다. 수업시간에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어떻게 만들었는가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데, 한 꼬마 왈, "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면 무엇이든 못할게 없을테니, 자신이 들 수 없는 바윗돌도 만들 수 있지 않겠냐" 고 물음서,내 표정을 본다. 뭐라고,답하나 기대된갑다.
내가 학원을 한지 20년쯤 되었지만, 난 이런 꼬마애들을 가르쳐본적이 없다. 학원을 처음 할 때 중학생 사춘기 여자애 둘을 가르쳐본 적이 있는데, 이 애들이 나한테 트라우마를 심어주고 갔다. 샘을 존중하는 맘은 둘째고, 지 둘이서 싸우다 왔나, 서로 얼굴 돌린채 길다란 책상 양끝에 앉아서 말 대꾸도 안해준다. 애들 비위 맞추느라 땀을 삐질삐질 흘린 경험이 있어서다. 문 밖에서 마누라가 "이 애들 털어먹음, 니는 오늘 죽었다." 하고 감시할 때이다. 지집애들이 강의실 들어옴서 문을 손으로 열고 들어오는 법이 없다. 발로 툭 차고 들어온다. 그뒤로 난 어린 애들 무서워서 고등학생만 주로 가르쳤다.
어쨌던 열심 잘가르치겠다고 꼬셔서 반을 열었는데, "샘 시집갔어요?" 하고 폐강하기 어려워서 가르치기는 하지만 학원 포트폴리오로는 계륵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난 고등학생들과 고등에 해당하는 똘똘한 중등은 프로그램이 있지만, 애들 같이 초등 4학년은 프로그램도 없어서 수업 때마다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 이전에 조카가 애들 데꼬 수업을 할 때는 조카가 만들어온 수업자료를 쓱 보고 수업 때 이런 이야기만 더 해줘라 고 아는 척 코멘트를 해줬을 뿐이다.
조카가 만들어서 자료를 주고 간 헤세의 데미안은 옛날 학교 다닐 때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그것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제 수업자료도 내가 만들어서 들어가야한다. 조카가 짜놓은 프로그램 마지막 책 두 권이 집나간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 '인형의 집'과 '안나 카레니나'란 바람난 여인의 이야기이다.
입센 인형의 집을 읽었다. 애들 대상으로 쓴 축약판을 읽는데 세상에 이렇게 재미도 없나? 애들은 이런 책을 무슨 생각을 함서 읽을까! 수업함서, "재밌었어?" 그랬더니, 재미는 무슨 재미여요? 그럼서 쳐다본다." 샘은 책을 재미로 읽어요?"라는 표정이다. 공부니까 읽지! 역시 나보다 낫다. 똘똘이들이다. 하나의 책이 명작이자 고전이 된 것은 시대의 힘이란 생각을 들게 한 책이 '인형의 집'이다. 페미니스트들의 세계를 힘차게 열어준 시대의 정신을 담은 책이다. 정신을 이해는 하지만, 그런데 읽어도 감동은 솔직 없다. 집에서 쫒겨난 남자를 많이 봐서 그런가.
이번 주에는 안나카레니나다. 인터넷에 안나 카레니나를 넣었더니, 내 학교 다닐 때 책받침 미녀였던 소피 마르소가 얼굴을 쑥 내민다. 반갑다. 영화 주연이었다. 지금 봐도 예쁘다. 아, 그사람도 지금은 거의 할머니지! 앞의 인형의 집도 처음이지만, 안나 카레니나도 역시 처음 읽는다. 도서관에 대출하러 갔더니 책이 무려 3권이나 된다. 초딩이 보고 이 3권을 읽으라고 ,역시 아동자료실에 가니 활자도 크고 삽화도 이따만하게 그린 200페이지짜리가 있다. 그것을 들고 왔다. 한시간이면 읽을거 같다.
그것만 읽고 말하기엔 넘 문자향이 안날것 같아서, "어떻게 살아야할까"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란 성대 노문과 교수가 쓴 책도 같이 덤으로 읽기로 했다. 그런데 애들용으로 축약해서 번역한 안나 카레니나를 읽어도 한시간 반 수업내용을 채우기에 충분할 정도의 건더기는 건져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고전은 고전이어서 생각할 만한 화두들이 듬뿍 담겨져있다. 거기에다 난 안나카레니나란 하나의 불륜소설에 불과한지만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도 덤으로!
내가 읽은 카레니나는 인간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한다. 행복한 삶이란 우리에게 넘 당연한 것 아닌가? 다만 그 행복의 종착지가 몸이냐 아님 맘이냐 차이만 있을 뿐이지. 그래서 그 행복을 몸으로 아님 맘으로 얻을 것인가 선택사항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소설에서 안나는 행복을 추구했지만, 그녀의 삶은 자신을 열차에 내던지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그녀의 삶이 불행한 비극이었어라고 말하기는 어려워보인다. 인간의 삶이 꼭 행복하게 살아야하는가 라는 것에 의문을 갖게 한다. 조금 불행하면 어떤가? 그런데 애들한테 이렇게 말해도 되나?
거장이란 달라서 톨스토이는 이것말고도 치정에 불과한 불륜사건을 갖고서 삶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던진다. 앞에 행복만이 아니라 선과 악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 소설은 불륜이란 죄악을 다루고 있기에 선인과 악인이 뚜렷하게 금이 그어져야 하는데 소설의 전개과정에서는 선과 악의 경계가 희미해진다는 것이다. 안나와 브론스키는 불륜의 두 당사자이기에 나쁜 년놈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 이성적으로는 죄악이지만, 심정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불륜이란 재료도 훌륭한 요리사가 어떠한 향신료를 갖고 주물럭거리느냐에 따라서 선남선녀의 사랑으로 질적 변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하나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심리의 분석에서도 탁월해보인다. 안나가 브론스키와 바람을 피고 난 뒤에 남편에게 용서를 비는 고백을 읽을 때이다."자기도 모르겠단다. 무섭단다! "남편을 두고 바람을 피게하는 자신 안에 있는 또 다른 여자가 무섭단다. 그러면서 "옛날의 진정한 나에게 돌아가고 싶다." 그런다. 그래 우리 인간의 정신세계는 얼마나 복잡한가.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고,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고 그렇지 않던가? 영혼은 알 수 없다.
인간이 죄를 저지르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우리는 그것이 죄인지 몰라서,아님 어쩔수 없이 강제되어서 잘못된 행위를 할 수도 있다. 그런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몰랐다고 오리발을 턱 내밀고 버티면 다일까? 그것은 아닐것같고! 이때에 우리는 잘못된 행위에 대해 처절한 반성을 하면서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아리스토틀이 그랬다. 또 하나는 안나같이 내 마음속의 욕망을 이길 수가 없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 죄를 저질렀을 경우는? 이런 때에 소설에서 안나는 죽음으로서 브론스키 역시도 죽으러 전쟁터로 가지 않던가? 목숨걸고 책임져야한다고 소설에서는 그려진다 고 한다. 넘 짧은것으로 읽어서 사실 여기는 조금 불명확하다..
이 마지막은 애들 에세이를 지도하다 보면 자주 나오는 물음이다. "Are you responsible for your action beyond your control? "이란 제목인데, 너가 '통제할 수 없는' 행동에 책임을 져야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라는 윤리학적 질문이다.
영화가 제대로 나오기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는 자신의 소설이 나중에 영화화될거라고 생각했나? 화면으로 잘 꾸며지도록 디테일에 엄청 강하고 나중에 몽타쥬기법으로 영화를 수월하게 만들 수 있도록 썼다고 한다. 어쨌던 거장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미래를 자연스럽게 품에 담는 능력이 있나보다. 원소스 멀티유징이 가능하게 말이다.
톨스토이는 나이가 82살이 넘었나, 재산을 놓고 마눌과 격돌 집을 나가 떠돌다가 어느 한적한 역사에서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그랬다해도 학원을 나간 조카는 그래도 잘살아야지!!
밑에는 집나가는 톨스토이 사진이다.뒤에 바랑에 뭘 담았을까. 인간에 대한 숭고한 사랑 그리고 마눌에 대한 미움, 아님 갈아입을 속옷 나부랑이.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