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해서 해롱거린던 모슬포의 어느 늦은 밤, 갑자기 눈 앞에 뜬금없이 바오밥나무가 나타났다. 그 이국적 자태에 '어린왕자'가 떠올랐는데, 난 바오밥이란 나무를 거기에서 처음 들어서다. 그런데 술깨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뭔나무' 아님 '먼나무'라고 부른다는, 봄철에 핏물을 토해내듯 붉은 구슬같은 열매를 땅에다 내놓는 나무이다. 제주에 왔다갔다 한지 4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그 나무가 '먼나무'인지 몰랐다니! '어린왕자'를 꼼꼼 읽어보니 바오밥나무도 내가 생각했던 거와 달랐다. 난 '아낌없이 주는 나무'같이 후덕한 할머니인지 알았는데, 뿌리채 파내야하는 사악한 마귀 할멈같은 탐욕을 상징으로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난 이 책을 읽은것 같았는데, 읽지 않았던지, 아님 읽었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그렇단다, 이 동화를 읽고 이해할려면 어른이 읽되, 어린 시절의 감수성을 가졌을 때만이 마음에 읽혀진다 한다. 그래서 애들은 감수성은 있지만 세상을 몰라서 읽어도 이해가 어렵고, 어른들은 세상을 알지만 세파에 찌글어져 어린 시절의 감수성을 잃었기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단다.
저자인 '생텍쥐'에게 사람들이 물었다. 고향이 어디냐?고, 그가 말하길 자신의 고향은 '나의 어린 시절'이라고 했다 한다. 그는 사막만 좋아한게 아니라 도시의 와글와글한 카페에 앉아있는 것도 좋아했는데, 그렇지만 그가 도시의 번다한 카페에 혼자 앉아있을 땐, 그는 항상 자신의 고향에 가있었다고. 이 책을 쓰게 된것도 뉴욕의 어느 카페에 어린 왕자 그림을 낙서하고 있는 그를 보고, 출판사 사장이 크리스마스에 맞춰서 애들 대상으로 써보라고 해서 나오게 됐다 한다.
책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자신이 동심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하소연하면서 부터. 우리가 잘아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의 이야기다. 주인공이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렸는데, 어른들은 이 그림을 모자로만 받아들였다. 하도 답답해서 보아뱀을 그리고, 그 뱃속에 코끼리를 담아서 그려주었더니, 이제 그런 장난은 그만두고 다른 공부나 열심히 하란다. 이게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자신의 꿈을 접은 계기이고, 이러면서 자신이 동심을 떠나게 되었단다.
그렇지만 애들의 세계를 떠나서도 어른들의 세계에서 그들과 잘 지낸 것도 아니었다. 대화를 나눌 사람없이 혼자서 외롭게 지냈을 뿐. 그러다가 6년전 사하라 사막에 엔진고장으로 혼자 있게 되었을 때, 그 때 거기에서 옛날 헤어졌던 어린시절의 나, '어린왕자' 를 다시 만나게 된다. 어떻게 알아봤냐고? 양을 그려주기 귀찮아서 빈 박스 하나를 슥슥 그려서 주었는데, 그애가 박스 속에 들어있는 양을 바로 알아보았으니까. 그때 난 일주일치분의 물밖에 없었단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사막에서 일주일 조금 넘게 그애와 같이 지난 이야기이다.
셍텍쥐가 그 애를 다시 자기의 별에 보내고, 문명으로 돌아와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은 딱 하나란다.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야하는가? 라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난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 가라는 것, 그렇지만 어린 애들은 다 알고있지만, 우리는 다 까먹고 있는 것. 순수의 세계, 어떤 사람들은 이 세계를 야만의 세계라고도 부른다. 그 세계에 살 때 마음대로 살아야하는데, 어른이 되어서 문명의 세계로 들어오면서 우리는 그 마음을 떠나서 머리로만 살면서 다 잊는단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오듯, 생텍쥐는 사막에서 어린왕자를 만나고 그 복음?을 우리가 사는 세계에 다시 들고 온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가?
애들 눈에는 창가에 제라늄 꽃이 자라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사는 장미빛 벽돌로 지은게 집인데, 똑같은 것을 어른들은 지폐더미로 바꾸어서 "얼마짜리야" 라고 이야기를 해주어야만이 상상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의 말도 그게 진리인지 아닌지는 그가 입고 있는 옷과 신고 있는 신발로서 판단을 하는게 지금의 어른들이란다.
우리는 혼자서 살아갈 수는 없고, 존 던이 말했듯이 서로 맺어진 매듭이거나 거미줄 아님 그물인데, 정현종 시인은 이를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가야할) 섬이 있다고도 표현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서로 간에 매듭을 묶을줄 모르고 또는 서로의 사이에 있는 섬에 다가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만이 인간으로 존재하고, 그런 상대가 없다면 나란 존재 역시 없다 한다. 그렇지않은 만남은 우리가 만나는 공간을 사막으로 만들어버린다는데, 우리가 사는 도시 어디에든 이제 사막은 널려 있단다.
그렇다면 '진정성'을 갖으려면 어떻게할까? 왕자는 이런 진정성은 상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집중, 그리고 또 집중해야 한단다. 그렇지 않고 나만의 세계에 빠져있다면, 이는 사람이 아니라 '버섯'이란다. 밑에는 어린왕자와 내가 나눈 대화이다.
"가시는 무엇에 쓸까?" 라는. 어린왕자의 물음에, 나는 귀찮아져서 "그건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라면서, "꽃들이 괜히 심술을 부리는거다" 라고 답하자, 왕자는 아니란다. " 꽃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시를 쓴다"는 거란다. 그러면서 “ 나는 얼굴이 시뻘건 신사가 살고 있는 어떤 별을 알고 있어.그는 한번도 꽃향기를 맡아 본 적이 없고 별을 쳐다본 적도 없어. 그리고 누구를 사랑해본 적도 없어. 오로지 덧셈 밖에 하지않아. 그러면서 하루종일 <”나는 진실한 사람이다!>라고만 되뇌이고 있어 그는 사람이 아냐, 버섯이지” 라고 타박을 한다.
"나에겐 꽃이 하나 있는데, 매일 물을 줘. 또 화산도 세개 있는데, 주일마다 한번씩 지펴준단다. 내겐 갖는다는게 꽃이나 화산에게 도움이 되는거야. 하지만 아저씨는 별들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않아" 라고 말이다.
진정성이란 이처럼 상대에게 도움이 되어주는 것. 이 때가 상대를 사랑하는 것인데 , 이러한 사랑에는 반드시 서로가 서로를 길들이는 작업이 필요하단다. 그래야만 나에게 상대가 의미있는 티인으로 남겨져서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는 길들였을 때만이 서로에게 의미있는 '꽃'이 되어지기도 하고 또 우리 사이에 있는 '섬'에 갈 수도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섬'
"우린 우리가 길들인 것밖에는 이해할 수가 없는데, 사람들은 더 이상 어떤 것을 이해할 시간을 갖고 있지 않아. 상점에서 이미 만들어진 물건만 산단 말이야. 그러나 우정을 살 수 있는 가게는 없어. 사람들에겐 이제 친구도 사라질거야. 네가 친구를 원한다면 어서 나를 길들여줘!"
어떤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세상의 수많은 여우가 아니라 나에게 의미있는 여우가 된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너가 나에게 의미있는 사람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말한다.이것을 우리는 그 사람을 안다라고 한다. 내게 '아는 사람'은 곧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 것이다.
어린왕자는 우리가 잊고있었던 어린 시절의 내 마음 속에 있는 천둥 벌거숭이 이야기다. 이것을 붉은 마음이라고 해서 '단심'이라고도 부르지 않던가. 어린 왕자는 내 마음 속에 잊혀진 그 애와의 만남이다. 우리가 지나온 먼과거로 되돌아서가서 천둥벌거숭이를 만나고 그 애와 함께 우리가 사는 세계로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도 떠났다한다. 소설에서 어린왕자가 자신의 별로 되돌아가듯이, 이 소설의 작가 역시 44년 뱅기를 타고 자신의 별을 찾아서 떠났다고 한다. 우리도 언젠가는 이 지구를 떠나서 자신의 별으로 길을 나설것이다. 사막에 떨어진 이 친구와 같이 우리에게 마실 물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를 일이다.
Comments